이 영상은 원래 재책 내용이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빠진 부분입니다. 가장 젊은 날의 철학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제가 살던 베를린 외곽의 작은 동네에는 토끼가 참 많이 살았습니다.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다가 봄이 되면 어디선지 한두 마리씩 나와 열심히 풀을 뜯었습니다.

그러다 여름이 되면 그 수가 수십 마리로 늘어 주변 풀밭을 다 차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동통한 어른 토끼들도 자그마한 새끼 토끼들도 삼삼오오 모여 오물오물 풀을 씹어 삼 흔히 부활절 토끼라고 불리는 독일의 들토끼들은 땅굴을 파고 삽니다.

풀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맨 땅이었던 곳도 토끼들이 점령하고 나면 수십 개의 작은 구멍들이 생기죠.

토끼들은 괜히 귀가 길쭉한 게 아닙니다.

항상 귀를 쫑긋하게 세우면서 조심히 풀을 뜯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나 까마귀가 가까이 다가간다 싶으면 잽싸게 굴속으로 대피합니다.

그 속도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루는 토끼굴 주의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여섯 마리의 토끼들은 귀를 예민하게 세운 채로 풀을 뜯고 있었죠.

제가 가까이 다가가니 얼른 굴속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토끼들이 다시 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작은 녀석 한 마리가 들어간 구멍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1분 정도 후 그 녀석은 10m 떨어진 다른 구멍에서 머리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포식자가 지나갔나 조심히 주의를 살피며 귀 끝부터 굴 밖으로 내 미는 녀석의 모습은 상당히 귀여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토끼들도 각기 다른 구멍에서 한두 마리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원래 들어갔던 구멍으로 다시 나온 녀석도 있었고 다른 구멍으로 나온 녀석도 있었죠.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토끼 굴은 단지 단독적인 구멍들이 여러 개 나열돼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각 구멍이 땅속에서 복합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미로라는 것을요.

그 안에서는 토끼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토끼굴 사례가 리좀을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재료라고 생각합니다.

리좀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리좀은 간단히 말하자면 위아래의 구별이 없고 입구와 출구의 구별이 없으며 모든 지점이 다른 모든 지점과 이어질 수 있고 또 모든 지점이 다른 모든 지점과 끊어질 수도 있는 체계를 말합니다.

리좀은 우리가 체계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나무 구조와 대비를 이룹니다.

나무 구조에는 명확한 서열이 있습니다.

뿌리, 줄기, 가지, 잎으로 쭉 이어져 순서대로 뻗어 나갑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무 구조로 파악하는데 익숙합니다.

수학을 공부하려면 사칙 연산부터 시작해 집합, 방정식, 함수 등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에 미적분을 해야 제대로 된 수학 공부 같습니다.

회사에는 각 부서가 있고 그 부서에는 또다시 말단 직원, 중간 직급 직원, 팀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부서를 아우르는 더 상위의 임원들이 있죠.

물론 요즘엔 세상이 바뀌고 있지만요.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학문에도 나무 구조가 있습니다.

심리학이라는, 그 밑에 실험 심리학인지, 심리학 발달 심리학, 성격 심리학 등의 하위 분야가 있고 그 밑에는 또 다시 세부 구조가 있습니다.

나무 구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식을 순차적 구조로 분류하는데 익숙하며 외부에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그 틀에 맞게 분류합니다.

리좀은 나무 구조가 아닌 뿌리줄기 구조를 뜻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뿌리 줄기는 깔끔한 형태를 가진 뿌리가 아닙니다.

즉 단순히 수직적인 나무 구조의 일부를 이루는 부속품으로서의 뿌리가 아니라는 거죠.

뿌리 줄기는 지저분하게 마구 뒤엉킨 채로 엉망진창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물을 뜻합니다.

거기에는 시작과 끝, 상위와 하위 같은 서열을 나눌 기준이 없습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어디가 중심인지 모릅니다.

지금은 지점 A, 지점 B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면서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금방 A에서 새로운 줄기가 뻗어 나와 B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A, B 사이의 구별은 의미 없게 됩니다. 리좀은 명확한 체계나 순서에 따라 자라나지 않습니다.

예측 불가하게 매 순간 이전의 체계를 깨부수면서 자라납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글은 매우 어려운데요, 그 이유 역시 그들이 리좀 럼 책을 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기승전결을 가진 책 구조로부터 벗어나서 예측 불가능한 연결성이 확장되는 책을 쓰려고 했던 거죠.

토끼 굴은 리좀의 면모를 일부 갖고 있습니다.

토끼 굴은 입구와 출구가 여러 개 존재하기에 이쪽으로 들어갔다가 저쪽으로 나가는 게 자유롭습니다.

꼭 이리로 가야 한다, 저리로 가야 한다 같은 고정적 규칙 같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굴 속에는 여러 방이 존재하고 그 방들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모양이 수정되거나 새로운 방이 생겨납니다.

굴들이 있는 새로운 연결 통로가 생겨나고 그 통로는 또다시 여러 출입구로 이어집니다.

토끼 굴은 이미 생겨난 상태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한국에서 주거 공간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아파트는 토끼 굴과 매우 다릅니다. 저는 아파트는 리좀이 아닌 나무 구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보편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아파트의 형식은 나무 구조를 따르고 있죠.

1층에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으로 올라갑니다.

마치 물이 나무에 뿌리부터 줄기를 타고 올라가듯이,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자신에게 배정된 집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각 집에는 수직적으로 연결된 배관과 전선이 지나갑니다.

한 라인에 모든 집이 수직적으로 연결돼 있기에 모든 집은 서로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집 화장실은 윗집 화장실 밑에 있어야 하고 밑에 집 화장실은 우리 집 화장실 밑에 있어야 합니다.

각 층은 계단을 통해 서로 인접한 층으로만 순차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10층은 9층 및 11층과 연결돼 있죠. 나무 구조에서는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연결이 생겨나는 게 불가능합니다.

갑자기 10층과 2층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통로가 생겨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원래 설계된 대로 고정적으로 기존 체계에 맞게 배열돼 있습니다.

이런 나무 구조의 아파트에서는 예외라는 게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이전에 없던 공간이 갑자기 생겨나거나 체계에 맞지 않는 일탈적인 공간이 생겨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게 쉽게 분류, 파악될 수 있도록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은 반드시 정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주차장, 쓰레기 수거장, 공용 현관, 놀이터 등등 모든 공간은 사람들의 예상을 조금도 빗겨 가선 안 됩니다.

되도록 모든 게 정석적이고 투명해야 합니다.

음습한 곳, 위험의 소지가 있는 곳, 상식적 패턴에서 벗어나는 곳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생겨날 싹이라도 보이면 관리 사무소에서 얼른 출동해 제거해야 합니다.

나무 구조에 기초한 아파트의 환경은 한편으로 큰 편리함을 줍니다.

모든 게 예을 벗어나지 않고 수직적으로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일을 적은 비용으로 빨리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저 주민 수칙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파트는 안전합니다.

유럽 같은 곳이야 전통적인 주거 형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고층 아파트가 있는 지역이 슬럼화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의 경우 아파트가 다른 어떤 주거 공간보다도 안전합니다.

경비 인력이 상주하는 데다가 관리 사무소가 항상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음침한 곳에 일탈적인 사람들이 스며들 여지가 적습니다.

곳곳에 설치된 CCTV와 환한 전등이 아예 모든 사각지대와 어둠을 제거하기도 하죠.

물론 안 그런 아파트도 많지만, 적어도 우리가 좋다고 평가하는 아파트들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편리함의 이면에는 치명적 문제점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 또한 수직적 형태로 제약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파트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관리사무소에서 일처리를 다 해 주니까 편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반대로 말하면 나는 관리 사무소의 수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위험하고 일탈적인 공간이 없다는 건 분명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이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기존에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수직적인 구조에 반하는 공간이 절대로 생겨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체계를 깨뜨리는 것, 새로움, 변화, 예측 불가능성 등이 아파트에는 없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아파트는 토끼 굴과 상당히 다릅니다. 토끼들은 필요에 따라 새로운 굴을 파고 굴과 굴 사이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쪽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저쪽 구멍으로 나가면서 땅이라는 공간을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파트에서는 이런 창의성이 상당히 제약, 물론 아파트에서도 최소한의 창의성을 발휘할 공간은 있습니다.

자신의 집 안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리모델링도 해보고 새로운 물건도 배치해 보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폭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수직적으로 반듯하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조를 주민 한 명이 임의로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화장실 위치를 아예 옮겨 버리거나 8층과 3층 사이에 비밀 통로 같은 걸 만들 수 없다는 거죠.

이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사는 게 중요하지 무슨 변화나 창의성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냐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인간은 살아 숨 쉬는 한 항상 공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공간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근본적 조건이어서 단순히 삶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내 존재에 근간을 이룹니다.

인간은 생활 공간에 막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나무 구조의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리즘 구조의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는 꽤 어려워집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매우 강한 검열 의식을 특징으로 합니다.

사람들은 준법 정신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런데 그만큼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한국과 많은 외국이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는 주변에 표시돼 있는 문구의 개수입니다.

대한민국 아파트의 진짜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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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파트의 진짜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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